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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대표소설 「황제를 위하여」 코믹하면서도 우울한 황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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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보신 분이라면 우리가 읽는 삼국지 번역본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는걸 아실겁니다. 삼국지는 중국소설인만큼 번역을 위한 중문실력은 기본이고 원문이 딱딱할 수 있기에 중국 고사와 실제 역사를 응용하고 소설 내 상황을 원작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한국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작문실력과 센스도 중요합니다. 그만큼 삼국지 번역은 진입장벽도 높은데 이문열 작가의 번역본은 세손가락안에 꼽힙니다.

 

그만큼 이문열 작가는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이런 이문열 작가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준 소설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문열 작가의 지식에 감탄하게 됩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가벼운 소설을 주로 읽으셨다면 읽기 어렵고 지루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각종 고사들이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사실 저도 이방면은 문외한이라 고사들은 95%이상 이해 못하고 넘어갔지만 소설의 전개와 분위기, 인물의 해석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정감록'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정감록'은 이씨(李) 조선왕조가 쇠퇴하던 조선 후기에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정씨(鄭)왕조가 등장할 것을 주장한 조선 후기의 예언서입니다. 조선 정부가 '금서'로 지정할만큼 그 내용이 디테일해서 백성들이 이씨 왕조에대한 저항심을 키울만했다고 합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정씨들은 "혹시 내가?"하는 기대감을 가졌고 일부는 "내가 정감록에서 말하는 다음 왕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자신의 아들을 '그 정씨'라고 확신한(또는 만들기 위한)  '황제 메이커' 정 처사로부터 시작됩니다.

 

 

고종 황제

 

 

그것이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한 정 처사의 조작이었든 아니든 우리 황제에게는 탄생 전부터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나며 그 추종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황제 본인도 긴가민가했지만 아버지의 세뇌교육과 추종자들의 찬양 그리고 성장하면서 일어나는 각종 이상한 일들을 겪으며 자신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후 황제는 제왕으로서의 학문과 덕을 쌓는데에 열중합니다.

 

하지만 정감록은 그저 예언서일뿐입니다. 지나던 길에 정 처사와 황제를 알게 된 한 도사는 꿈을 불어넣어주던 다른 귀인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바뀌어 가는 세상에 과거의 학문에 매달리는 것은 황제에게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라고요. 정 처사는 기분 나빠하며 귀담아 듣지 않고 쫒아버립니다.

 

 

조선시대 철도

 

 

황제가 도시에 살았었다면 모를까 황제의 가족과 추종자들은 산골짜기 '흰돌머리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으며 제왕의 학문만을 닦던 황제는 변화된 문물에 적응하지 못하고 각종 수난과 창피를 겪게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황제는 훤칠한 키와 용모 등 '황제의 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왕의 학문을 닦으며 생긴 해박한 지식. 그리고 타고난 맑은 천성이 있었습니다. 비록 정감록의 예언은 망상일지라도 황제라는 인간 자체는 뛰어난 인간이었음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충신들이 등장하여 황제의 꿈을 지켜줍니다.

 

 

황제는 한국의 돈키호테?

 

 

"웃기다"라는 책의 후기가 많지만 저는 황제가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황제는 부귀영화와 권력만을 위한 황제가 아닌 만민을 위한 황제를 꿈꿨고, 그 천성과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랬기에 신학문을 배운 사람조차 막말로 '정신이 나간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황제를 따랐습니다.

 

이 소설의 황제를 그저 예언서 하나에 눈이 멀어 황제가 되고자 한 '바보멍청이' '희화화의 대상'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복잡해지고 각박해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고수하고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존경받는 모습이 우리 삶에서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자신만의 올바른 가치관을 고수하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아... 나는 천민의 꿈을 꾸고 있는 제왕인가, 아니면 제왕의 꿈을 꾸고 있는 천민인가"라는 황제의 한마디는 똑같이 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울적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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